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장애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많은 편견과 불합리한 일을 겪고 있지만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사회 참여와 권리가 소외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지체가 부자유한 사람을 장애자 또는 모자란 자 라고도 하며 무시하고 멀리한다. 지적 부자유자에게도 같은 편견을 갖고 있다.
그런데 2000년 전 예수님이 계셨던 시대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사회적 약자이고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지금은 법적으로 장애인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 보호되고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하고 많은 인식과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장애인에게 먼저 찾아가 손을 내미신다.
현대문명이 발달한 지금도 장애인을 보는 시각은 좀 불편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인식이 있음을 본다.
그러나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요9:1)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요9:2) 이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요9:3)이라고 말씀하신다.
맹인의 삶은 앞이 보이지 않아 불편할 뿐이지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아시고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생각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한 과정으로 바라보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입법은 상황의 필요에 맞게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마치 이스라엘의 율법처럼 의무적이고 구속적인 굴레를 만들어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법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에 매인 삶이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법에 매인 자가 아니라 중심에서 사랑과 긍휼을 나누는 인생이 되길 원하신다. 소경의 눈에 진흙을 이겨 낫게 하실 때 마음이 입법의 마음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이었기에 인격적으로 바라보신 것이다.
예배 후 장애와 관련된 영상을 시청했다.
내용은 거의 보지 못했지만 그 속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차별 없는 한 인격체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의 변화을 바라는 감독의 메시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장애를 정죄하기보다 연약한 지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우리가 알아갈 때 하나님이 일하시고 영광 받으신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말씀하신다.
짧게나마 소그룹 모임을 사모하는 지현형제와 삶을 나누며 우리의 삶이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닌 나누며 서로를 세워가는 삶임을 깨닫는다. 연약한 가지의 모습인 우리는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의 양분을 먹지 못할 때 썩어져가고 부러지는 것을 볼 때 값 없이 주신 양분을 서로 나누는 일이 얼마나 영혼을 낚는 어부의 삶인지 다시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은혜을 나누는 자나 받는자나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는 삶이기에 우리의 모임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생각케 한다.
교회도 각자의 자리에서 각양 모양으로 헌신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예배의 준비를 위한 예배의 자리에서, 찬양으로 예배을 돕는 찬양의 자리에서, 영상으로 성도의 예배를 돕는 영상의 자리에서, 점심 식사로 육의 양식을 담당하는 봉사의 자리에서, 설거지의 자리, 각각 맡은 1인 1사역의 자라에서, 새로오신 교우를 섬김는 자리에서, 눈에 보이나 보이지 않으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일하시고 영광 받으신다.
교회는 모임의 공동체이고 나눔의 공동체이며 격려의 공동체이고 섬김의 공동체이다. 이는 말씀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모임의 회을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는 공동체, 지식이나 재물이 앞서지 않는 예수님이 하신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하나님과 교제하신 본을 따르는 하늘땅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아픈 환우들이 교회에 많은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일터임을 새삼 알아가며 주님의 하실 일을 위해 한 지체 한 지체가 통로가 되어가기를 바라본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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